음란, 상업성의 내용은 별도의 통지없이 삭제합니다.
그냥 좋은 영화보고 뭔가 써보고 싶어서 올립니다. 그럼 건강하십시요
저예산 독립영화로써 관객 100만명 돌파라는 신기원을 목전에 둔 영화 “워낭소리”는 우리민중의 상징적 동물인 “소”를 통해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한 향수만을 불러일으키는 기록영화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구구절절한 감상문은 이 후에 영화를 보게 될 회원의 즐거움을 빼앗는 몹쓸 행위라고 생각되어 노동조합 위원장의 시각으로 바라본 워낭소리의 한 부분만을 적고자 한다. 영화는 어린 시절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논에서 쟁기질을 하시며 외치던 “워려 워려” 소리를 들어보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지루할 정도로 느린 호흡으로 끌고간다. 그도 그럴 것이 팔순을 바라보는 노부부와 불혹(?)을 바라보는 늙은 소의 액션이라는 것은 숨넘어갈 것 같은 불안감마저 엄습한다. 워낭소리가 기록영화로써 특이한 점은 제작자의 기획의도를 깔아주는 내레이션이 없다는 것이다. 본인은 다큐멘터리에서 읊어주는 내레이션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관람자가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제작자의 의도에 발맞추어 화면을 이해해야할 필요는 없으며 꼭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감상 후에 전문가 비평을 따로 챙기면 되는 일을 굳이 감상의 즐거움을 빼앗기면서까지 미리 알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낭 소리”에서 생략된 내레이션은 관객에 대한 제작자의 배려라고 보기엔 너무 무성의 하다. 이건 처음부터 기획의도 같은 건 아예 없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제작자는 우연찮은 기회에 지인으로부터 “팔순 노부부와 사십 먹은 늙은 소가 경상북도 어느 골짜기에 살고 있다더라” 라는 말을 듣고 “어! 그래” 하며 그냥 싼 맛에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3년여에 걸쳐 조명기사 하나 없이 달랑 16mm카메라 촬영감독 하나만이 그들의 느릿한 행적을 무던하게 따라 다녔을 뿐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카메라 앵글은 형식적인 조망이나 어망 한두 번을 빼면 사람 머리 정도의 높이에서 시종 고정되었다는 것이다. 유일한 상황 설명이라는 것은 고작 고집불통인 할아버지에 대한 할머니의 넋두리와 잔소리가 전부인 이 지루하고 상투적인 영화가 나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할아버지의 노동 때문이다. 말이 일하는 소지 이 늙고 병든 소는 봄에 그리 넓지 않은 논 밭 쟁기질 하는 것을 제외하면 할아버지를 일터에 싣고 간 후 종일 양지 뜸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해가 기울면 다시 할아버지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는 자가용으로 전업한지 꽤 오래 된 듯하다. 극 중에서 진짜 소는 바로 할아버지였다. 읍내 비료상에서 판촉물로 나누어주는 남루한 입성으로 어릴적 침을 잘못 맞아 불편한 한 쪽 다리를 끌며 하루 종일 논밭을 기어다니다시피하며 농사를 짓는다.
어떤 산악인에게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는가?” 라고 묻자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오른다”라는 선문답처럼 노인에게 농사는 “논밭이 거기에 있으니까 짓는다”가 어울릴 정도로 끊임없이 일을 한다. 노부부는 그 하품 나는 소출로 무려 칠남매를 키웠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노인에게 있어 농사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저 자식들 키우고 끼니 굶지 않는 것으로 만족 하는 “일”일 뿐이지 어떤 부귀와 출세의 발판이 아니었으리라. 몇 년 전 어떤 조합원이 이 회사는 대단한 출세나 고소득이 보장될 것 같지도 않고 비전이 없어서 일 할 맛이 안 난다. 라는 불평을 늘어놓았을 때 정해진 인원으로 운영하는 이런 사업체는 직장에 출근하며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그랬듯이 논에 물대고 밭에 김매러 나오는 심정으로 일을 해야지 그 이상을 바라면 나만 비참해질 뿐이고 만일 지금의 현실과 미래가 정 못 견디겠으면 그것이 보장되는 다른 직업으로 옮겨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라고 말했던 기억이 새롭다.
내 조상들이 소작을 부치며 또는 자작농으로 어떤 부귀영화를 꿈꾸며 일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식구들 굶기지 않고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철 따라 옷이나 한 벌씩 해 입으면 더 바랄 것도 없었던 소박한 선조였고 민족이었는데 한 줌도 안 되는 지배계층의 탐욕 때문에 과중한 세금과 소작료로 인해 소나무 껍질을 벗기며 연명했던 것이다. 그건 결코 노동자, 농민 입장만을 대변하는 억지논리가 아니라는 것을 워낭소리의 고집스런 노인네가 말해주고 있다. 이 땅의 거의 모든 사용자가 갖고 있는 부담가운데 “해주면 해주는 데로 더 달라고 아우성친다”. 는 강박관념이 있다. 하긴 노조 집행부도 그런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때가 있는데 사용자는 오죽하랴! 우리의 일터는 정녕 극 중 노인네의 논밭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건 내가 노조 위원장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경영자의 입장에서도 이런 감상이 떠오르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이치여야 할까? 이 영화는 나 혼자 볼 일이 아니라 전 임직원이 단체 관람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지금 노사가 갖고 있는 근거 없는 강박관념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말이다. 감독은 엉성하게 짜여진 마른 나뭇가지를 달구지에 싣고 자신도 지게에 한 짐을 진채로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한 장면을 찍으며 성자의 모습을 느꼈다고 했다. 이건 비단 감독만이 목도했던 풍경이 아니다. 과거 대지의 작가인 퍽 벅이 한국에 와서 느낀 의문가운데 “왜 조선인들은 그냥 달구지에 실어도 그만인 나뭇짐을 누구랄 것도 없이 이고지고 소달구지와 함께 걷는 것인가” 하며 물었다고 한다. 소와 사람의 관계를 경영자와 근로자의 관계로 치환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독일 수도 지나친 감상일 수도 있겠지만 그 관계가 아름답게 느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우리민족의 정서는 이런 것이었다. 갑작스런 산업화와 자본화가 황폐화 시켜놓기는 했어도 그 피가 마른 것은 아니지 않는가.
노동조합의 배급투쟁이 물질의 풍요를 가져다 줄 수는 있어도 노인이 갖고 있는 일에 대한 진정성과 순수성을 잃어버린다면 우리의 삶과 정신은 그 풍요와 상관없이 피폐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기획의도도 엿보이지 않는 그저 그런 영화에 너무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이를 가지는 것을 스스로 포기해 버린 내 삶에서 노인이 온 몸으로 말해주는 삶과 일 그리고 가족이라는 메시지를 자녀에게 들려주는 우아한 삶의 멋을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였다.





자유게시판
